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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배낭여행/타이완 여행

대만사람들이 일본을 좋아하는 역사적 이유

by 상실이남집사 2015. 10. 13.

대만이 일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남아있고, 많이 있는 이유.


대만여행을 다녀오고나서 이상하리만큼 대만에서는 일본어가 영어만큼 통용이 가능하였으며,

일본의 문화들이 여러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유가 궁금하여 여기저기 사실이라고 판단된 자료들을 주워모아?서 정리를 해 봅니다.




대만이라는 섬은 중국역사에서 언급된 적이 없고, 명나라에서야 언급이 되기 시작합니다.

원래 대만에는 남방어계의 말레이시아쪽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으며, 고산족이라고 불리는 토착 원주민이

사는 섬이였습니다.


이 섬이 최초로 발견된 때는 유럽의 대항해 시대에서 발견되어 포르투갈 선단이 도착하게되고, 북부지역에

잠시 거주하게 됩니다. 이들이 타이완을 아름다운섬(llha Formosa)라고 부르고 타이완을 이명칭으로 서양에

소개하게됩니다.


이후, 1624년 네델란드의 동인도회사가 대만의 남부 젤란디아 요새와 현재 타아이난지역에

한핑이라는 소규모의 거주지를 건설하게되며, 네델란드의 통치가 시작됩니다.

1626년 스페인이 현재의 지룽에 요새를 건설하고, 산살바도르로 불렀으며, 

1629년 스페인이 현재의 단수이지역을 카스틸로라고 부르고 이 지역에서 식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게 됩니다.


1642년 필리핀의 내란을 틈타 스페인이 대만 북부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 시점에 네델란드가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던, 북부지역가지 점령한 후 젤란디아 요새를 식민수도로 결정하였고, 이 후 동인도회사를 통해 타이완을 관할하기 시작합니다.즉, 총통이 임명되고 중국인 및 토착인(고산족)에게 과세를 실시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점령을 시작한 후 대만섬을 중심으로, 동인도회사는 교역과 해운의 중심지로 육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중국으로부터 비단, 도자기 및 약재를 수입하고 일본 및 네덜란드로 재수출을 하며 지냅니다.


1644년 만주족이 명나라를 침입하여 중국 대륙이 혼란해지자, 중국 푸젠성 남부와 광둥성 동부 지역의 중국인들이 대만섬으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그때 네덜란드는 중국인들에게 농지 소유를 허락하지 않고,

중과세 정책을 시행하게되자 중국인들은 항거하며 1652년 궈화이이를 중심으로 봉기하였고,

이에 따라 네덜란드의 식민통치 기반이 크게 약화가됩니다.

이때 만주족의 대륙지배에 항거하며 명나라의 재건을 도모하던 정청궁이 1662년 네덜란드의 잔류 세력을

몰아내고 안핑을 새로운 도읍으로 정하며, 정청공과 그의 아들 정징이 유교교육을 바탕으로 중국식 법제와

관급과 문화를 이식합니다.


이후 중국인들의 대만섬으로의 이주는 증가하기 시작했으나 1682년 정징이 사망하자 청나라는 1683년에

군대를 파견하고 타이완을 점령합니다.(이때부터 중국의 영향원에 대만섬이 들어가게 됩니다.)


청나라 왕조의 통치가 시작되고, 농업이 지속적으로 발전하자 19세기에 들어서 영국,미국,프러시아 및 일본 등 세계의 열강들의 관심을 받게되고, 타이완의 항구 4곳을 압력에 의해 개방하게 되었고, 

열강들은 타이완의 주요 지역을 공략하고 거점화하려는 노력을 지속합니다.


청나라는 어떻게든 개발과 방어를 도모하기위해 1822년 타이완을 청나라의 22번째 성으로 편입시키고 1823년에는 리우밍촨을 최초의 성장으로 파견하고 지방행정 조직을 체계화하고, 교통, 우편, 통신망을 정비하는 등

타이완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1895년 청나라와 일본 사이의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212년간의 통치가 마감되고,

시모노세끼조약을 통해서 일본의 통치가 시작되게 됩니다.

이때 타이완의 토착세력들은 일본에 대해 타이완 할양에 반대하며 독립운동을 했지만,

일본은 독립 움직임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50년간의 식민통치를 시작합니다.



일본이 타이완을 통치하기 시작하며, 잔존 저항세력을 제압함과 동시에 일본식 통치체제를 확립하기위학 노력을 시작합니다. 일본은 철저한 경찰 통제, 전 지역에 걸친 토지 조사, 도량형 표준화 등을 실시하였고,

학교를 만들어 일본어 교육을 의무화하고, 문화 동화정책을 실시하며, 도로와 철도, 상하수도 시설을 만듭니다.


일본 식민통치당시 일본식 이름의 사용(우리나라 창씨계명과 같은)을 의무화하고 신사참배 등을 강요합니다.


일본이 폐망을 하게된 1945년 8월 일본이 타이완을 연합국에 양도한 후 국부군을 타이완에 파견하여 인수작업을 실시하게됩니다.

타이완 거주민들은 초기에는 국부군을 환영하였지만 국부군이 부패하고 타이완 거주민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들에게 점차 불만을 품게되었을 때, 1947년 2월 28일 2.28사건이 발생합니다.

탈세 담배를 팔던 노인의 담배를 강제 몰수한 연주공매국 직원에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폭행을 당하게되고,

이를 구경하던 행인 한명이 총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관할 경찰서가 오히려 가해자를 비호하는 행동을

보이자 격분한 시민들이 공매국으로 몰려가 시위를 벌이고 이 시위가 타이완 전역에 확산이 되었고,

타이완의 여론 주도층들은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2.28사건 처리위원회를 구성하였으나,

국부군은 21사단을 파견하여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여론 주도층 대부분을 처형하게 되었으며,

이때 2만여명이 학살이 되었습니다. 그로인해서 본토사람들과 타이완인들의 갈등이 심화되게 됩니다.



위는 타이완의 발견부터 왜 타이완사람들이 본토사람들에게 호감을 보이지 않는지에 대한 내용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기술하였습니다.


조금 간략히 내용을 한번 더 정리해보자면(제가 썼어도 너무 두서없이 적은 듯 ㅡㅡ;)

위에서 보듯이 식민통치 시기가 길었던 탓에 대만사람들은 한번도 자기가 나라를 가졌다고 생각해본적이 없는 사람들이라서 자기나라를 잃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통치자가 바뀐거라고만 생각을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일본통치는 일본통치가 가장 훌룡한 정치로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학교와 도로와 철도, 상하수도 등을 건설하여 근대화에 가장 많은 신경을 써줬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대만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저항이 적었던 시기이고, 유혈사태가 적었던 시기였습니다.


일본이 세계대전이 패하고 퇴각한 후에도 중국은 내부의 정치적문제로 국민당이 대만을 통치하게되었으나,

부패한 통치세력에 대한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었고, 군중이 분노로 2.28사건이 발발하게 되며, 대만사람들이 국민당 정권에게 2만여명이 학살되며, 본토와의 갈등이 더 심화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그 당시 2만여명이라는 사람들은 지금도 거의 모든 대만 사람들에게는 잊을 수 없이 연류되어 있는 사건입니다.


모든 대만 사람들이 일본을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수많은 식민시설을 거치게 되었고, 정작 다시 중국에 편입되어 통치되던 시절에 크나큰 사건이 일어남으로 인해서,일본 식민지로 있었던 당시가 많은 대만 사람들에게 평화로웠던 시기로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가장 크지 않았을까..라고 생각됩니다.

또, 일본 식민시절 가장 많은 발전을 하고, 사회적 기반을 다져진 기억때문에 아무래도 일본에게 우호적인 면이 많이 남아 있는게 아닐까..하고 생각하며 글을 마쳐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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